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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오기로 하면서 가장 큰 고민이자 걱정은 "내가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였다. 다행스럽고 고맙게도 회사는 그래도 좋다고 했고, 난 이민 직후 힘들 것이 뻔한 경제상황에서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다. 문제는 최근 이어진 잔인한 환율과, 더 심각하게는, AI의 무서운 발달로 출판계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다호의 시골 생활은 너무나 평화롭다. 아이 방학이 시작된 이후로는 오전에 도서관, 오후에 운동과 학원(없는 날도 있다)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요즘은 도서관에 와서 노트북을 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 무겁다. 내가 십 년 넘게 해 온 일, 그러니까 책을 만드는 일이 발밑에서부터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는 걸 매일 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출판은 호황인 적이 거의 없는 업계였지만, 지금의 변화는 결이 다르다. 이번엔 책을 '쓰는' 방식과 '읽는' 방식이 동시에 바뀌고 있다.
가장 먼저 체감하는 변화는 어떤 책이 팔리고 어떤 책이 안 팔리는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두툼한 프로그래밍 입문서, 특정 언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떼는 기술서가 꾸준히 나갔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책을 굳이 사지 않는다. 막히는 부분을 AI에게 물어보면 코드 예제까지 즉석에서 나오는데, 600쪽짜리 교재를 사서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쳐 힘들게 읽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은 "AI가 내 일을, 내 아이의 미래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 같은 질문을 다루는 책은 사본다. 그것은 AI에게 물어서 얻기에는 한계가 있는 답변인데다, 전문가의 식견이 그야말로 빛을 발하는 분야이다. 사람들에게는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이 데려올 변화에 대한 불안과 호기심이 훨씬 크다. 이 흐름이 출판사 입장에서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그런 교양서는 기술 전문 출판사가 아니라 누구나 낼 수 있어서 경쟁이 훨씬 치열하다. 정확히 아는 사람만 쓸 수 있던 책의 자리가, 누구나 그럴듯하게 쓸 수 있는 자리로 옮겨 가고 있다.
그래서 세계의 출판사들은 책을 '파는' 방식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구독 모델이다. 기술서로 유명한 미국의 오라일리(O'Reilly)는 아예 몇 해 전부터 책을 한 권씩 파는 걸 멈췄다. 대신 매달 일정 금액을 내면 수만 권의 전자책과 강의를 통째로 보는 학습 플랫폼으로 변신했다. 책장을 채우는 회사에서 배움을 빌려주는 회사로 정체성을 바꾼 것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건 '완성되지 않은 책'을 파는 방식이다. 매닝(Manning) 같은 곳은 책이 다 쓰이기도 전에, 집필 중인 원고를 챕터 단위로 먼저 읽게 해 준다. AI 도구는 한 달이 멀다 하고 바뀌는데 종이책은 인쇄되는 순간 이미 옛날 정보가 되니, 아예 살아 움직이는 책을 만들어 계속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편집자로서 이 대목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완결된 한 권'이라는 내가 사랑했던 책의 형태가 흐려지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것도 오라일리나 매닝 같은 대형 출판사에게나 가능한 옵션이고, 내가 일하는 중소형 출판사가 실제로 추진하기에는 여러 가지 고민할 점이 있다.
이 모든 변화를 보면서 자꾸 떠오르는 건, 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나다. 한국에서 쌓아 온 경력과 감각이 이곳에선 절반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익숙한 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던 시간. 운전면허 시험부터 아이 학교 이메일 한 통까지, 당연하던 것들이 전부 새로 익혀야 할 과제가 되던 그 막막함을 기억한다.
지금 출판이 겪는 일도 어떤 면에서는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종이책이라는 익숙한 형태를 붙들고 버틸 것인지, 아니면 형태를 바꿔서라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무언가로 남을 것인지의 문제이다. "책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모양을 바꿀 뿐이고, 그 옆에는 여전히 좋은 문장을 골라내고 다듬는 누군가가 필요할 것이다"라고, 오늘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도서관에서 조용히 믿어 본다.